제목: 건평리 추억
이름: 이효철


등록일: 2010-04-24 07:51
조회수: 3177 / 추천수: 303


   오늘 이야기에 나오는 건평리라는 바닷가를 저와 함께 찾았던 동문이 몇 있습니다. 만드리라는 무인도에 캠핑가는라, 장지포에 낚시하러 같이 갔다가 비를 피해 그 친구 집에 신세진 적도 있었습니다. 혹 이 글 읽고 그 추억이 떠오르면 댓글로 ....... 


  건평리 추억

 대학에 입학해서 처음 자기를 소개하는 시간에 고향이 강화도라고 했더니 학과 친구들이 집안이 바닷가의 어부 출신이냐고 해서 그렇지 않고 오히려 강화도에서는 어부보다는 농사짓는 집이 더 많고 어업에 종사하는 집은 별로 없다고 대답했는데 지방 출신의 몇은 매우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절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하는 표정으로 말이다.
 강화도라고 하면 어촌마을의 작은 섬 일거라 생각하는 무지(無知)는 그 이전의 옛날에도 있었던 모양이다.
 작은 섬에서 공을 차면 공이 바다에 빠질 터인데 강화도에서도 축구할 수 있냐고 물었다는 선생님의 학교 친구를 방학 때 강화로 데려와서 집으로 같이 오는 동안 산길에서 노루 한마리가 바로 길옆에서 튀는 바람에 놀란 그 친구가‘강화가 넓긴 매우 넓다야.’라고 감탄했다는 선생님의 이야기에 우리 반 친구들은 한참이나 유쾌하게 웃었던 기억이 아직도 있는데 초등학교 삼학년 때 쯤 이야기다.
 그 선생님의 친구는 강화의 친구 집에 놀러 온 동안에도 강화도 바다 구경은 거의 못하고 돌아갔을 것이다. 왜냐하면 선생님의 집도 농촌마을이었지 바닷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 선생님의 친구가 겨울방학에 왔었다면 방학 때마다 학교 운동장에서 열리는 부락대항 축구시합을 한참이나 구경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렸을 적 겨울방학 때마다 열리는 부락대항 축구대회 기간 중 양도면의 남정네는 거지반이 축구대회가 열린 학교 운동장에 모여 축구시합을 구경하느라고 법석댔었기 때문이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어린 시절을 강화도에서 살았지만 바다는 거의 경험하지 못하고 지냈다.
 내 고향 마을 살무니는 바닷가에서 십리 정도 떨어진 곳의 산자락 마을인데 한자로는‘山門’으로 표기되는 동내로 강화도 안에서도 손꼽히는 산골마을이다. 살무니는 삼면이 산으로 막혀있어서 남쪽으로는 진강산 그리고 북쪽으로는 덕정산으로 둘러싸여있는데 두 산을 연이은 동녘의 불우리 고개도 한참이나 산길을 걸어야 넘을 수 있는 만만하지 않은 산줄기다. 오직 동내의 서쪽 방향으로 흐르는 용내 쪽으로만 벌판이 터져있어 그 용내를 따라 십리를 지나면 건평리의 장지포 방죽에 이르고 그 방죽 뚝 건너서가 비로소 바다인데 초등학교 시절 그 바닷가에 가보기는 그렇게 쉽지 않았다.
 해마다 여름이면 장지포로 가래질하는 어른들을 쫓아 건평 쪽으로 수없이 다녀왔어도 방죽에서 고기 잡는 데만 신경을 썼을 뿐 바로 뚝 너머 코앞의 바닷가로 가보거나 놀아 본 경우는 거의 없었다.
 동내에서 좀 높은 곳에 오르면 그 바다가 보이지만 바다건너에 곧바로 석모도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그 바다는 수평선을 볼 수 없는 작은 호수와 같은 모습이어서 학교에서 배우는 넓은 바다와는 그 이미지부터 달랐으니 살무니에서 보이는 건평 바다는 나로 하여금 큰 호기심을 같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향이 강화라고 해도 바다보다는 동내 뒤쪽의 진강산에 대한 추억이 더 많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나의 어린 시절이다. 

 그 건평 바다를 바닷가에서 처음으로 보게 된 것은 인천 가는 똑대기를 타러 아버지를 따라 건평 뱃터에 갔던 초등학교 시절의 어느 날이었다.
 그런데 건평바다는 배터의 오 분 거리까지 가까이 가도 언덕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살무니 집을 나서 흥천을 지나 용내길을 따라 독정집 옆의 다리와 만나는 신작로를 만나노고산 쪽으로 제법 걸어가도 그저 평범한 시골길이지 바로 코앞에 바다가 있다는 분위기는 어디서도 느낄 수 없었다.
 노고산 끝자락동내의 야트막한 언덕에 올라서야 비로소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 길로 내려서며 바닷가 길옆의 어업조합, 지서 등 색다른 건물을 지나면 바로 건평포구의 큰 너럭바위다.
 이미 언덕을 넘어서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면서부터 내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는데 배표 파는 집 앞의 넓은 바위위에 서서 건평 앞바다를 바라보는 순간 선수와 석모도 사이에 펼쳐진 수평선이 내 마음을 완전히 크게 흔들어댔다.
 지금까지 인천 갈 때 몇 번이나 봤었던 초지 쪽의 강 같은 바다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바다가 눈앞에 펼쳐있었다.
  이 넓디넓은 바다가 살무니에서 자그마한 호수 같이 보이던 바로 그 바다란 말인가.......
 저 멀리 보이는 수평선의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저기 건너편에 보이는 섬의 저 마을에는 누가 살고 있는 걸까........
 

 아마 내가 바닷가 가까이서 수평선을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내가 바닷가로 더 가까이 가보려고 바위 아래쪽으로 뛰어가려하니 아버지가 위험하다고 말려서 그 자리에 앉았지만 내 시선은 이곳저곳 바다에서 한 순간도 떨어질 수가 없었다.
 얼마 뒤 외포리 쪽에서 다가오는 똑대기가 도착해서 전마선에 올라 여객선에 옮겨 탈 때까지 나는 계속 들뜬 기분으로 넋을 잃고 바다를 구경했었다. 
 

 그 건평 바다에서 수영도 하고 낚시도 해보고 굴도 따보고 하며 즐겼던 때는 중 고등학교 시절이었는데 똑대기표를 파는 그 집이 바로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의 집으로 그 친구와는 초등학교 때 두 번이나 짝꿍을 했었고 고등학교는 동창으로 삼년간 같은 반이었다.
 하여튼 여름방학 때 그 친구 집에 놀러갈 때마다 무척 재미있었다.
 너럭바위에서는 민낚시로도 고기가 잘 잡혔는데 어느 날은 굵은 뱀장어를 잠깐 동안에 서너 마리 연달아 낚아내기도 했고 근처의 아래쪽 진장바위에서 몇몇이 긴 장대를 낚싯대로 해서 굵은 숭어를 연달아 잡아내는 것을 보기도 했다.

 “야, 저기 제들이 잡아내는 게 뭐냐. 아주 큰 고기다.”
 “응, 그거 숭어 낚시다.”
 “그거, 방죽서 가래질 때 잡히던 모쟁이(손바닥 보다 약간 더 큰 크기의 숭어 새끼)보다 엄청 크다. 아주 잘 잡히는데....... 봐라. 봐라, 또 한 마리 건져낸다.”
  "그래, 이번 꺼는 상당히 큰 모양이다. 따통이네.”
 “따통? 야, 따통이 뮈냐.”
 “응, 큰 숭어를 따통이라고 하는데 두 자 가웃이상 크기면 따통이라고 해.”
 “여기선 숭어낚시 할 수 없냐?”
 “여긴 들물이 안 들어서 숭어가 잘 안 잡혀. 그리고 채비도 다르고 미끼도 다르고 대도 더 길어야 하고......”
 숭어낚시는 조금 때 밀물에 따라 들어오는 푸른색의 맑은 들물이 갯바위에 밀려들어오는 두세 시간의 잠깐 사이를 노려서 떼 숭어를 잡아낸다고 했는데 진장바위가 숭어낚시를 할 수 있는 가장 마지막 낚시자리로 진장바위의 북쪽으로는 조금 때라도 먼 바다의 파란 물이 미치지 못하고 언제나 누런색의 탁한 바닷물만 흐르기 때문에 숭어가 미끼를 잘 볼 수 없기 때문이라 했다. 그러고 보니 더 북쪽의 외포리의 바다는 건평보다 더 바닷물 색이 탁할 뿐 아니라 물살도 건평보다는 더 거세어 일 년 내내 한 번도 푸른 바다를 볼 수 없다는 것도 나중에 알게 됐다.  

 한번은 친구 집에 놀러 갔더니 엄청 큰 고기 두 마리가 처마에 매달려 있었는데 바다에 처 놓은 주낙으로 아침에 건진 농어라고 했다. 그날 점심때 농어 국으로 맛있게 식사를 하고 오후에 친구와 나는 반두를 가지고 장지포 방죽에 가서 주낙 미끼용으로 손바닥 크기의 붕어를 수십 마리 잡아 친구 집 뒷껕의 샘터에 살려두었는데 집 앞은 운동장보다 서너 배나 넓은 너럭바위에 그 앞이 수평선이 보이는 바다요 집 뒤로 바로 울타리 안에 졸졸 샘이 넘쳐흐르는 친구 집터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친구 집에는 어렸을 적엔 짐 부리는 돛이 달린 큰 중선 두 척과 똑대기에 손님과 짐을 나르는 도선용 전마선이 있었고 우리가 고등학교 때에는 건평에서 처음으로 디젤 엔진의 새 배를 지어 부렸는데 그 친구의 집은 건평을 중심으로 각종 짐을 실어 날랐기 때문에 배를 부렸어도 어업이 아닌 해상 운송업을 한 셈이다.
 건평에 배를 부리는 다른 몇 집도 대부분 짐배였지 어선은 거의 없었다고 했다.  

 건평 바닷가에서는 한 여름 큰 장마 때 배를 띄워서 바다에 떠내려 오는 잡동사니에서 골라 건진 나무 등을 말려 한겨울 땔감을 넉넉하게 마련한다고 했는데 물난리 때마다 한강, 임진강, 그리고 예성강을 통해 많은 것들이 건평바다까지 밀려온다고 했다.
 나도 어느 해 대학생 시절 하일 앞 바닷가에서 장마에 밀려온 이런저런 나무더미 중 부러진 굵은 나무 하나를 갯가로 건져내보니 그 나무에 달라붙어있던 개구리들과 뱀이 함께 갯가에 내려 육지 쪽으로 향하는 걸 본 적이 있었다.

대학교 이학년 때 학과 친구 네 명과 함께 건평 친구 집의 그 디젤엔진 배를 빌려 타고 시간 반 거리의 만도리라는 무인도를 찾아 일주일간 캠핑을 간 적이 있었는데 그 것을 마지막으로 그 뒤로 20여 년간 건평 바다를 찾지 못했다.
 건평리 친구네는 그 다음핸가 인천으로 이사를 했고 나도 졸업 후 군대를 마치자마자 직장을 지방에서 다니다가 어느 날 건평리에서 열린 초등학교 동창모임에서야 다시 건평바다를 찾았다. 초등학교 졸업한 지 35년쯤 지나서였는데 내가 대전에 근무할 때로 서울에서 그 건평 친구와 만나 내 차로 건평리까지 동행했다. 그런데 그 친구도 인천으로 이사 간 후 처음으로 건평을 찾아가본다고 했다.
 20여 년 만에 다시 찾은 그곳은 몰라보게 여기저기 변해있었다.
 시멘트포장으로 바뀐 옛 신작로 길은 그런대로 낯이 익었고 바다건너 섬의 모습도 옛 그대로 반가웠으나 친구의 집터와 집 앞의 너럭바위는 흔적조차 찾기 힘들었다. 예전의 지서나 어업조합도 있었던 곳도 가름하기가 혼란스러웠다.
 “영렬아. 저쯤이 네 집 있던 쪽 아니냐. 워낙 변해 어딘지 잘 모르겠는데.......”
 친구는 아무 대답 없이 그저 옛 집터 쪽만 바라볼 뿐이었다. 나보다 더 큰 충격에 빠져있음이 분명했다.
 “어쩌다 건평 돌을 계속 석재로 캐간다는 이야긴 들었어도 이럴 줄은.......허긴 하일 앞 구라바위도 남포로 다 깼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도 한참이다.”
 너럭바위 끝자락 산 밑에 있어서 샘물이 흐르던 친구의 집터는 깡그리 사라진 너럭바위가 그 위치를 가름하기 조차 어렵게 하고 있었다.
 “건평 화강암이 국내에서 최고 좋은 돌이라고 해서 초등학교 시절 국회의사당 공사에도 여기서 돌을 가져갔다고 했잖아.”
 “그래, 양도초등학교 다닐 때 신축한 교실도 양도면 회관, 동광 중학교, 읍에 복지관....... 강화의 그때 쯤 신축 건물 모두 건평에서 돌 떠다가 지은 거, 잘 알고 있지. 옛날 우리 집 배도 엄청 돌을 실어 날랐거든.”
 친구가 입을 열어 옛 일을 하나하나 더듬어내기 시작했다.
 둘은 갯벌과 잡석더미로 변해 푹 꺼져있는 너럭바위 쪽을 바라보면서 한참이나 옛 적을 회상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계속했다.
 “야. 니덜 둘, 빨리 들어와. 뭐하고 있냐. 다들 자리 잡았다고......”
 어업조합 터 근처에 생긴 횟집에서 모임 총무 되는 친구가 부르는 소리에 우리 둘은 몸을 돌려 횟집 쪽으로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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