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잡지에 실린 제가 쓴 글입니다.
이름: 이효철


등록일: 2009-01-21 14:10
조회수: 3914 / 추천수: 361


 낚시춘추라는 잡지 신년호에 제가 쓴 글이 실렸습니다. 육십평생에 처음 제 글이 소위 메스컴을 탄겁니다. 사실은 원고를 보내고도 아무 연락이 없어서 잊고 있었는데 얼마전 인터넷에서 고향의 장지포라하는 지명을 검색하다가 제 이름이 보여 깜짝 놀라 살펴보니 낚시춘추의 글 중 '장지포수로와 가래질'이라는 제목의 제 글이 제 이름과 함께 올라있는것이 아닙니까. 인터넷 검색을 안했다면 아직까지 제글이 잡지에 실린 줄도 까맣게 모를 뻔 했습니다.
 당장 책을 사보니 내용도 길고 서툴렀는지 여러 곳이 삭제되어 실렸습니다. 특히 내가 큰 가물치와 뱀장어 잡은 이야기가 실린 글에 모두 빠져있어서 여기에는 그 내용도 구별되게 해서 올립니다. 역시 전문가들은 글을 잘 손질하더군요.
 모두 살려놓고 보니 내용이 좀 길기는 기네요. 길어도 부담없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장지포 방죽과 가래질
   ( (주) 낚시춘추 2009년 신년호에 실린 글입니다. 글 중에 청색 부분은 잡지에서 삭제된 부분이며 녹색부분은 교정되었으며 분홍색 부분은 제가 다시 원고를 고치거나 추가한 곳으로 잡지에는 물론 안 실렸거나 다르게 실렸습니다. 가래를 물푸레나무로 만드는 줄 알았는데 달라서 고친 곳이 있습니다.)


 우리 마을에서는 외포리 수로를 외포리 수로라고 부르는 대신 모두 장지포 방죽이라 불렀다. 예전부터 외포리 수로를 장지포 방죽이라 불렀던 모양인데 왜 장지포라는 이름으로 불렀는지 그 연고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나는 인천서 초등학교 일학년을 마치고 강화로 이사하여 양도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육십여 호의 시골 동내인 산문부락이라는 곳에서 살았는데 산문 부락을 고향에서는“살무니”또는“살무이”라고 불렀다. 진강산과 덕정산에 둘러싸인 산문 부락에서 장지포 방죽까지는 십리가 조금 넘는 거리로 용내 뚝 길을 따라 걸어가면 방죽에 다다른다.

 

내가 장지포 방죽을 처음 보게 된 것은 아마 삼학년 때인 것으로 기억한다.

어렸을 적부터 건평리에서 통통 여객선을 타고 인천을 다녀온 적이 가끔 있어 건평리의 바다 쪽은 몇 번 간 적이 있었지만 건평리에서 가장 높은 산인 노고산을 넘어가는 언덕길 쪽으로는 가본 적이 없었다.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느 날 아버지를 따라 노고산길로 간 적이 있다. 건평리에서는 가장 높다지만 노고산은 높이가 백 미터 정도의 야산으로 그 언덕길은 그 산 높이의 절반정도를 넘는 길이었다. 산길을 따라 언덕위에 올라서니 눈앞에 넓은 들판과 바다가 들어왔다. 멀리 외포리가 보이고 외포리에서 이쪽 노고산 밑자락까지 바다를 막은 뚝 길이 보이는데 뚝 길의 왼쪽은 바다요 오른쪽은 들판이다. 왼편의 바다 쪽은 바다건너 가까이의 석모도가 바다를 길게 막고 있어 인천바다와 같은 넓은 바다의 모습은 아니고 오히려 강과 같은 느낌이어서 그렇게 인상적은 아니었다. 오히려 오른편의 넓은 평야와 그 들판의 수로가 내 눈길을 더 끌었다. 동내 앞 논들보다 수십 배 이상 넓은 들판을 제법 높은 곳에서 가까이 내려다보기도 처음인데 그 들판에는 논 뿐 만 아니라 넓고 긴 수로가 놓여있어서 수로를 보는 그 순간 내 가슴은 나도 모르게 뛰고 있었다. 그 수로가 바로 장지포 방죽이었다. 넓고 긴 수로는 여러 군데 작은 수로와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 작은 수로의 하나만 해도 지금가지 고기 잡고 역 감던 살무니의 용내보다 훨씬 크고 넓은데다 물이 흘러내리는 개울과는 그 분위기도 달랐다. 그 물속에는 개울에서 보다 더 큰 고기들이 득시글득시글할 것 같이 보였다. 언덕 바로아래의 길이 끝난 곳을 배나드리라 하는데 거기서는 방죽의 건너편을 건너다니는 줄이 연결된 거룻배가 있는 곳이다. 마침 두 사람이 거룻배를 타고 배안에서 줄을 당겨 이편으로 건너오는 모습이 보였는데 그 모습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넓은 들판과 수로, 그리고 물을 건너는 거룻배 ......,

그 광경은 오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직 내 뇌리에 선명히 남아있다.

 

그 장지포 방죽을 본격적으로 찾기 시작한 것은 그해인가 아니면 다음해인가는 분명하지 않지만 소위 가래질하러가는 어른들을 쫓아다니면서 부터다.

가래질.

당시 고향의 대부분 집에서는 가래라고 하는 도구를 가지고 있었다.

가래는 따끔쟁이나무와 싸리나무 등을 엮어 만드는 일종의 통발이다.

가래를 만들려면 곧은 따끔쟁이나무를 손가락 굵기 정도로 쪼개어 다듬거나 곧고 적당한 굵기의 싸리나무 등을 수십 개 모아서 밑동은 약간 뾰족하게 다듬은 후 일 미터 정도의 길이로 맞추어 윗동은 잘라내어 가랫살로 준비한다. 한편으로 다래 넝쿨을 한 아름 정도로 둥글게 모양을 잡아 묶어 가래의 지지대로 만들어 놓은 후 준비한 가랫살 하나하나를 지지대의 바깥쪽에 손가락 하나정도의 간격을 두고 엮는데 가랫살의 굵은 쪽이 가래의 아래쪽을 향하게 그리고 지지대가 가래의 중간보다 약간 아래쪽에 자리 잡도록 해서 어른 팔로 한 둘레 정도의 원통으로 모양을 잡고 위쪽은 나무들의 간격이 거의 없이 촘촘히 엮어서 한 뼘 조금 넘을 정도의 둥근 구멍을 남긴다. 위쪽은 칡넝쿨로 잘 싸매어 엮어서 윗구멍을 통해 가래 안으로 팔을 집어넣었다 빼어내었다 해도 불편하지 않게 마무리한다.

봄철에 암탉이 병아리를 치면 밤에는 어미닭과 병아리를 같이 아니면 병아리만 가래 안에 가두어 두고 위쪽에는 무거운 것을 올려놓아서 병아리를 지키는데 사용한다.

이렇게 병아리를 키우는데 가래를 사용하는데 병아리가 커지면 가래는 여름까지 집 한쪽에 가래질 철까지 보관된다.

한여름 논의 김매기가 끝날 무렵이면 방죽에서 가래질이 시작되는데 가래질은 할아버지 시절에도 해내려왔다는 고향의 전통고기잡이 방식이다.

점심을 든든하게 마친 후 동내 장정들은 가래와 망태를 메고 삼삼오오 장지포 방죽으로 출발한다. 가래도 어깨끈을 묶어 어깨에 메고 다닌다. 꼬마들도 서너 명 어른들을 쫓아 방죽으로 향한다. 살무니에서 가래질 가는 인원은 가래를 메고 가는 장정을 기준으로 보통 적게는 십여 명 많을 경우에는 이십 명 정도다.

용내 뚝 길을 따라 한 시간 정도 내려가면 시냇물의 흐름도 느려지다가 방죽에 이르면 거의 흐름이 없다. 살무니 장정들은 방죽가에 가래질 할 때 늘 옷을 벗어두는 장소에 도착한다. 거기서 어른들은 옷을 벗어두고 아랫도리차림으로 망태를 고쳐 맨 후 가래를 가지고 방죽에 들어선다. 우리들도 그곳에 옷을 벗고 발가벗은 채로 어른들을 쫓아 방죽에 들어간다.

처음 들어서는 곳은 도깨비 방죽이라고도 불리는 장지포 방죽의 지류인데 우리 부락 사람들은 언제나 도깨비 방죽에서부터 가래질을 시작했다. 이때쯤이면 해마다 수로의 수문을 낮게 조정하므로 방죽의 수심은 깊어야 한길 정도고 대부분 우리들 키로 배꼽 정도 이하였다. 방죽에 들어서면 어른들은 무리지어 가래로 바닥을 찍어 나아간다. 좁은 도깨비 방죽은 금방 감탕 빛으로 변하고 놀란 고기들은 여기저기로 도망치기 시작한다. 어른들은 흔적을 남기고 도망치는 눈앞의 고기를 기다리거나 쫓아 가래로 찍어 고기가 가래 안에 들면 손을 가래 안에 넣어 고기를 꺼내 망태에 집어넣는다. 그냥 가래로 바닥을 찍고 다니기만 해도 가래 안에 고기가 들고 그러면 가래 안에서 푸드득하고 갇힌 고기의 몸부림이 가래의 살을 통해 전달된다. 그러면 가래 찍기 동작 그만, 손 넣어 고기 잡아 꺼내기, 망태기에 고기담기, 그리고 다시 가래 찍기의 순서를 반복하면 된다. 이것이 가래질의 요령이다. 어린 우리들은 그 사이에서 도망치다가 여기저기 구석진 곳에 숨어있는 고기들을 잡아내는데 대부분 고기를 맨손으로 잡아낸다. 그런 기술을 더듬질이라 했는데 나는 또래 중에서 알아주는 더듬질 선수였다. 고기가 발에 밟혀 밟힌 고기를 잡아내는 경우도 가래질 때에는 흔했다. 꼬마들이 잡은 고기 중에 큰 것은 곧장 어른 망태에 가져다 담는다.

방죽에서 가래질로 잡히는 고기는 붕어가 가장 흔했는데 어른들은 적어도 이십 센티 이상이어야 망태에 잡아넣었고 작은 붕어는 아예 잡지도 않았다.

다음은 메기로 40센티부터 60센티 정도가 대부분이었지만 가끔은 거의 일 미터 급의 대형메기도 잡혔다.

가물치도 자주 잡혔는데 주로 사오십 센티였지만 가끔 미터 급 가물치가 잡혀 모두들 그 큰 가물치 잡는 사람을 부러워했다.

빠가사리도 흔했는데 어른 한 뼘 정도의 크기가 많았다. 그런데 빠가사리, 이게 늘 골치였다. 옆구리와 잔등에 가시가 셋 있어 이 가시에 쏘이면 피도 나고 무척이나 아팠는데 특히 빠가사리가 발에 밟혀 그 가시에 찔려 혼나는 적이 한두 번 아니다. 빠가사리 쏘인 데는 오줌이 약이라 해서 울면서 발바닥에 오줌 누던 경우도 있었지만 나중에는 발바닥이 쏘여도 오줌 누기는 하지 않았다. 어른들도 가래 안에 든 고기가 빠가사리인 것이 확인되면 노련하게 잡아서 가시를 분질러 망태에 넣던지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잡기를 포기하곤 했다. 빠가사리는 긴장하면 빠각 빠각 소리를 내기 때문에 금방 알 수 있다.

모쟁이라 부르는 한자 미만의 새끼숭어도 자주 잡힌다. 숭어는 바다 고기이지만 방죽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다. 숭어나 모쟁이는 달아날 때 물위로 튀어 오르기를 잘하는 고기로 가끔 물 밖까지 튀어나와 맨땅에서 펄떡이다가 맨 손으로 잡히는 경우도 많았다.

잉어도 가끔 잡혔지만 매우 귀한 편이라 한자 정도의 크기라도 대접을 받았다. 잉어가 잡히면 집안 어른에게 드리던지 아니면 따로 고아서 아버지가 드시던지 했다.

방죽에 뱀장어는 흔했지만 가래질로는 절대로 뱀장어를 잡을 수 없었다. 가래로 찍어 가래 안에 가두어도 곧바로 뱀장어는 뻘을 뚫고 도망치기 때문이다. 뱀장어만 전문으로 잡는 어른 몇이 작살이라고 불리는 도구를 이용해 뻘바닥을 긁어서 뱀장어만 잡아내는 것을 가끔 볼 수 있었다.

동내 가래질꾼들이 도깨비방죽에서 수로의 본류로 이동하면 배나드리 부근에서 다른 부락의 가래질꾼들과 합류하기 시작하는데 꾼이 많으면 많을수록 즉 방죽 안에 많은 사람이 북적댈수록 가래질은 더 잘된다. 그 안의 고기들은 이리 저리 도망 다니지만 가래질꾼들의 범위에서 탈출하기가 어려우니 그 안에서 도망치다가 지치게 마련이다. 한참 많을 때는 삼사백 명의 장정들이 장지포 방죽에 모여 가래질에 참여한다. 십리길 이내의 모든 동내에서 많은 장정들이 가래질로 모여 늦여름의 고기잡이 축제를 벌이는 것이다. 시끌벅적한 가래질의 행렬은 예전부터 해 내려온 방식대로 배나드리에서 모여 수문통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여기저기서 바닥을 가래로 찍어대며 무리지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다가 가래 안에 고기가 들면 가래 안으로 한 손을 넣어 고기를 움켜내느라 잠시 멈춘다. 누군가 큰 고기를 잡아내면 장원이요 즐거워 외치고 주위의 사람들은 축하도 하며 부러워도 한다. 꼬마들도 그사이에서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더듬질해나가며 마냥 즐거워한다. 얼마 가다보면 배나드리와 수문통 사이의 왼편 물가 쪽에 장지포방죽의 낚시터가 있다. 그곳은 많으면 대여섯 명 정도 앉아 낚시 할 수 있는 곳인데 가래질 때에도 늘 두서너 명 정도가 낚시하고 있었다. 무리가 그곳에 이르면 오른쪽으로 치우쳐서 약간은 빠른 속도로 가래를 찍어가며 지나쳐준다. 낚시꾼들도 가래질꾼들에게 별 불만 없이 그냥 낚시에 열중하고 있는데 그렇게 낚시터부근에서 지나쳐주는 것이 오래된 장지포방죽의 불문율이라고 한다. 낚시도 실제로는 가래질이 있어야 더 입질이 좋아지고 씨알도 굵어진다고 나중에 들었다.

가래질 무리가 수문통가까이 이르면 더 나아갈 곳이 없어 다시 방향을 돌려 가래질을 계속한다. 수문통에서 돌아 나오면 전보다는 조황이 떨어지지만 꼭꼭 숨었던 큰 고기가 숨 돌리다가 발각되어 횡재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돌아 나와서 아까 그 낚시터를 다시 만나면 이번에는 왼편으로 해서 마찬가지로 지나친다. 무리가 배나드리 전에서 작은 수로들을 만나면 각 부락별로 헤어져 자기들이 출발했던 쪽으로 가래질하며 헤어지기 시작한다. 조황이 좋으면 아예 방죽을 나서서 뚝 길로 오르기도 한다.

동내 일행이 도깨비 방죽 초입에 들어서면 살무니 일행의 가래질도 거의 파장이다.

방죽에서 대부분 나와 논 뚝 길로 해서 옷 벗어 놓은 곳으로 향한다.

그날 잡은 수확을 놓고 이야기하면서 돌아가는 길은 망태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더 발걸음이 가벼운 법이다.

대충 십여 수의 붕어, 세 네 마리의 메기, 가물치 한두 마리, 빠가사리 서너 마리 그 외에 손님고기 몇 마리 정도가 평균적인 수확인데 그중 서너 마리는 동행한 꼬마들의 것도 포함된다. 손님 고기로는 잉어나 새끼 숭어인 모쟁이가 보통이다. 어른들의 이야기로는 한사람이 가래질 한 번에 보통 두세 관 정도의 고기를 잡는다고 했다.

옷을 주워 입고 살무니 집까지 걸어오는 길은 배도 고프고 피곤한 저녁 길이다. 보통은 아버지 따라 다녔는데 먹을거리는 아예 없었고 남들도 그랬다. 오는 길 중간에 집의 밭에 들러 오이 몇 개로 허기를 달래보지만 배고픈 건 마찬가지, 그렇다고 집에 도착해도 즉시 저녁 먹는 것은 아니다. 아직 할 일이 하나 더 있다. 아버지는 잡은 고기를 손질하기 위해 고기들과 칼, 고기 그릇 그리고 언제나 호박잎 서너 장을 준비해 집 앞 개울로 향한다. 나도 개울에 들러 몸을 씻는데 이미 해가 기운 산골 동내라 물도 차가워 멱 감는 식으로 물에 첨벙 들어가기는 서늘하여 대충 대충 씻다가 아버지에게 혼나기 일쑤다. 호박잎은 메기나 빠가사리의 미끄덩거리는 표면 닦아내는 데는 최고의 물건이다. 메기 등을 호박잎에 감싸서 쥐고 닦아내면 아주 훌륭하게 손질되는데 아직까지도 호박잎으로 닦기보다 더 좋은 다른 방법을 본 적이 없다. 뱀장어의 경우도 호박잎이 손질에는 최고다.

이렇게 고기를 손질하여 집에 들어오면 그제야 저녁을 먹는데 어머니는 그때부터 다시 바빠진다. 손질된 고기로 조림을 만드는데 작은 감자도 넣고 간장으로 간하여 고추 등으로 맛을 낸다. 밤새도록 약한 불에 조리된 조림은 고기모양이 부스러지지도 않으면서도 뼈까지 흐물흐물하여 먹을 때 버릴 가시도 하나 없는 아주 정갈하고 맛있는 반찬으로 한여름 시골의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요 개학 후에는 최고의 도시락 반찬이 된다.

 

한해 여름동안 서너 번씩은 가래질을 다녀왔는데 거의 허탕은 없었던 것 같다.

어쩌다 잉어가 가래에 들면 대부분 가래 안에서 잉어를 움켜쥔 다음 가래를 그대로 거꾸로 들어 올려 어깨에 맨 채 조심조심 물 밖으로 나와서 잡은 잉어를 망태에 넣는데 그때마다 모두의 부러움을 받는다. 큰 미터 급 메기나 가물치의 경우면 더 말할 나위가 없는데 해마다 서너 마리의 대물이 가래질에 잡힌다. 한번은 어느 청년이 아주 큰 가물치를 가래 째 움켜쥐고 물 밖으로 나갔는데 가래는 다 부셔진 상태였다. 그 청년은 신이 나서 가래를 움켜쥔 채로 집으로 간다고 하면서 그대로 바삐 사라졌다.

나도 오학년 때인가 더듬질로 아주 큰 가물치를 잡아낸 적이 있었다.

가래질 행렬이 수문통을 지나 되돌아올 때쯤인데 낚시터 쪽으로 올라와 낚시하는 모습을 잠시 구경하다가 다시 방죽에 들어가 더듬질하면서 베나들이 방향으로 가던 중이었다. 물가에 잠겨있는 한 바위주변을 더듬다가 그 바위 밑 속으로 고기가 드나들 수 있는 구멍을 발견했다. 손을 구멍에 집어넣으니 고기의 감촉이 있다. 아주 큰 녀석이다. 얼른 그 구멍을 한쪽발로 막고 나서 주변의 다른 쪽을 더듬어나가니 다른 쪽으로 통하는 구멍이 하나 더 있었다. 그 구멍도 한 손으로 막은 후 다른 곳을 다른 손으로 여기저기를 더듬어보니 더 이상의 구멍은 없었다. 그렇다. 그 고기는 독안에 든 쥐다. 양 구멍에 이쪽저쪽으로 두 손을 각각 집어넣어보니 공간이 좁아 고기는 크게 저항도 못한다.

한쪽 구멍은 왼 손으로 막고 고기 머리가 향해있는 구멍으로 오른 손을 넣어 더듬어대면서 움직이기가 거북한 상태인 고기의 아가미와 입을 거머쥐고 나니 고기는 몸부림치지만 이미 상황은 끝이다. 바위틈의 고기가 가물치라는 것은 처음 발견했을 때부터 짐작했고 가물치가 아무리 힘이 세다 해도 아가미와 입을 움켜잡히면 도망치기 힘 든다는 것도 알고 있어 꼭 움켜쥔 채로 조심조심 바위틈에서 꺼내니 가물치는 요동을 친다. 남은 손으로 가물치 몸통을 붙잡고 물 밖으로 나와 뚝 위에 올라서서 가물치를 들고 큰 소리로 외쳤다.

“아버지. 가물치다.”

아버지뿐이랴. 모든 가래질꾼들이 뚝 위에서 두자 가까운 가물치를 움켜잡고 서있는 벌거숭이 꼬마를 보며 작은 녀석이 정말 대단하네 하면서들 쳐다보는데 나는 더 당당히 폼을 잡고 아버지가 물가로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장지포 방죽은 그렇게 가래질로 고기들을 잡아내도 큰 비 이후에는 또 많은 고기들이 모여들었다. 큰 홍수가 나면 강화도 수로 주변 바닷가에는 한강, 임진강, 예성강 등에서 바다로 떠내려 온 많은 민물고기들이 바글 바글거린다. 장지포방죽도 수문을 열어놓아 바다로 물을 방류하는데 바다로 떠밀린 민물고기들은 수로로 오르기 위해 필사적이다. 바닷물 염분 때문에 핏발이 선 민물고기들은 수문으로 튀어 올라 장지포 방죽으로 모인다.

나도 한번 장마철 비 그친 후 수문에서 그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많은 고기들이 수문위로 계속하여 튀어 오르는 사이사이 큰 고기들이 수문위로 튀어 오른 후 물이 세차게 흐르는 시멘트 바닥위에서 지느러미를 물 밖으로 노출한 체 물살을 거슬러 꼬리를 쳐대는 모습을 넋을 잃고 구경했다. 어른들은 쇠스랑으로 찍어 잡기도 한다는데 그날은 투망을 준비한 어른들이 단 한 번의 투망질로 일 미터 정도의 메기를 잡았으나 물살에 쓸려 내려가는 투망의 아찔한 순간을 경험하고는 더 이상의 투망질을 포기했다.

 

장마 후 수위가 안정되면 낚시도 잘 됐고 가래질도 잘 됐다. 큰 고기도 많았다.

 

그런데 내가 중학교 나닐 때부터 가래질이 주춤하기 시작했다.

나일론 삼중그물 즉 초코란 것이 등장했다.

어느 날 가래질 하는데 옆 동내 청년 몇이 가래질 하는 옆으로 초코를 쳤다가 들어내는데 보니 초코에는 고기들이 그야말로 주렁주렁 열려있었다. 그 크기도 대단한데 그 귀하게 여기는 잉어도 초코질 한 번에 서너 마리 씩 달려 나온다. 가래질 하던 다른 사람들의 기가 팍 죽어버린다. 그 뒤로는 초코질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리고 농약을 풀어 고기를 잡는 경우가 늘기 시작했다는데 이 고약한 방법 때문에 물 흐름이 약한 둠벙이나 방죽에서는 죽은 고기가 썩어나고 새물 들기가 어려워 냄새가 진동하는 등 부작용이 매우 심각했다. 농약으로 고기 잡는 것에 대해서는 상당히 말이 많았지만 그래도 방죽에서 몰래몰래 심심치 않게 행해진 모양이다. 어느 해는 그 넓은 장지포 방죽에서 농약 때문에 고기의 씨가 마른 적이 있다 했다.

중학교 때부터는 다시 인천으로 이사 갔기 때문에 다시 가래질하는데 따라가기가 어려워졌는데 중 일 때 한번 초코가 판치는 가래질에 쫓아가 본 것이 어른들을 쫓아다닌 마지막이었다.

이후에 고 일 때는 사촌과 동내 친구 몇몇이서 처음으로 직접 가래를 가지고 장지포를 찾아 여기저기 다니면서 가래질해봤는데 별 소득이 없었다. 그날따라 수심도 평소 가래질 하던 때보다 한자 정도는 더 깊었고 방죽에는 오직 낚시하는 두어 명만 보일 뿐 우리 이외의 다른 가래질꾼도 없었다. 깊은 물에서 서너 명만의 가래질로는 중과부적이었다. 수문 통 쪽 등의 본류에는 수심이 깊어 들어가지도 못하고 도깨비 방죽 등 지류 한두 곳을 가래로 뒤진 것이 고작이었다. 수확도 작은 붕어 몇 마리가 전부였다.

그러나 그날 나는 가래질에서는 누구도 잡아본 적이 없는 뱀장어를 그것도 매우 큰 뱀장어 한 마리를 더듬어서 잡아냈다. 좁은 수로에서 찍어대던 가래질을 접고 물가 쪽을 더듬어보다가 한 팔이 들어갈 정도의 구멍을 찾아냈다. 그 구멍에 손을 넣어보니 고기가 느껴진다. 이런 좁은 구멍에 있는 고기라면 뱀장어 아니면 빠가사리다. 주위를 더듬어보니 나갈 따른 구멍이 없는 곳에 갇힌 고기다. 팔을 더 뻗어 만져보니 뱀장어가 분명한데 머리가 손끝에 잡힐 듯 말 듯이다. 뱀장어는 더듬질로 잡아내기 가장 어려운 고기인데 미끄럽기가 최고로 미끄러운데다가 입과 아가미가 작아 손으로 입이나 아가미 쪽을 거머쥐는 방법도 없어 보통 냇가에서 뱀장어를 잡을 때는 어른들도 삽 등으로 찍어 잡았고 더듬질 할 때는 뱀장어를 모래와 함께 움켜쥔 후 빨리 밖으로 던져내는 방법이 뱀장어를 잡는 최고의 더듬질 기술로 통했다.

팔을 더 뻗어보니 더 뒤로 물러설 공간이 없어 뱀장어는 꼼짝하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이 뱀장어를 잡아낼 수 있나 하다가 순간적으로 잔인한 방식을 떠올렸다. 그렇다. 꼼작 못하는 뱀장어의 머리를 짓눌러 기절시킨 후 꺼내자. 즉시 엄지와 검지로 뱀장어 머리를 쥐고는 사정없이 힘주어 눌러대기를 서너 번 계속하니 뱀장어 머리가 상할 정도의 감각이 있었고 굼틀대던 뱀장어의 몸부림이 약해진다. 머리를 움켜쥐고 뱀장어를 당겨내니 힘을 잃은 뱀장어는 그대로 끌려나온다. 매우 큰 뱀장어였다. 그런 크기의 뱀장어를 더듬질로 잡아낸 것도 처음이었다. 잠시 후 또 다른 구멍에서 같은 모양으로 숨어있던 뱀장어를 발견했다. 주저하지 않고 조금 전 그 방법대로 뱀장어를 잡으려고 뱀장어머리를 손가락으로 짓눌러대며 팔을 뻗었다. 요놈도 꼼짝없이 잡힌 거다. 아까처럼 머리 짓눌러 잡는 방법이야말로 틀림없는 새로운 더듬질 기술이라고 확신하며 자신만만하게 팔을 뻗어 뱀장어 머리를 눌러대는데 두어 번 뒤로 물러서던 뱀장어가 갑자기 내 엄지손가락을 물어버린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뱀장어에게 물리자 나는 깜작 놀랐다. 뱀장어는 사람을 무는 고기가 아니다. 오죽했으면 이 녀석이 내 손가락을 물었단 말인가. 뱀장어 잡으려던 내 입장에서 죽기 싫어 몸부림치는 뱀장어의 입장으로 생각이 바뀌니 내가 너무 심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결국 나는 그 구멍에서 팔을 그대로 가만히 빼내고야 말았다. 그리고 곧 가래질을 끝내고 살무니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 살무니 작은 아버지는 조카가 잡아온 뱀장어로 고추장 구이를 직접 구어내시며 무척이나 즐거워하셨다. 오래 만에 훌륭한 장어구이를 맛본다 하시며 말이다.

그러나 그 것이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가래질이었다. 이후로는 동내에서도 거의 가래질을 가지 않는다고 했다. 굳이 장지포로 고기 잡으러 간다면 큰 반두로 그물몰이를 하거나 초코치기로 다닌다고 했다.

그렇게 장지포의 가래질은 60년대 중반에 들어 추억의 고기잡이로 사라진 것이다.

 

나는 가래질이 끊긴 후에도 장지포 방죽을 계속 찾게 되는데 바로 낚시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일학년 때부터 나는 붕어낚시를 시작했고 그때 자주 다니던 낚시터인 인천의 문학 저수지에서 낚시할 때에도 항상 고향의 장지포 방죽을 머리에 떠 올렸다. 장지포 방죽이 문학저수지보다도 더 좋은 낚시터일 거라고 확신하면서 언젠가는 반드시 장지포 방죽을 찾아 노고산 자락의 그 자리에서 꼭 낚시하리라 다짐하곤 했다.

처음 노고산 언덕에서 보았던 장지포 방죽의 풍경과 함께 가래질하던 추억, 그리고 낚시구경 하던 기억들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장지포 방죽은 점점 내 마음의 낚시터로 자리잡아갔다.

대학교 일학년 때 다시 강화로 이사했는데 이사한 곳은 아버지가 근무하는 동광 중학교가 있는 양도면 하일리로 살무니나 장지포 방죽까지는 비슷한 십리 길 거리의 동내다. 그래서 그 후로는 그 그리워하던 장지포 방죽 노고산자락의 그 낚시터를 자주 찾게 되었다.

대학교 이학년 여름방학의 절반 이상은 장지포 방죽에서 낚시로 시간을 보냈는데 대부분을 예전 가래질할 때부터 늘 보았던 바로 그 자리에서 낚시를 했다. 생전 처음 밤낚시를 경험하게 된 곳도 그 자리요, 떡밥낚시의 노하우 하나하나를 깨우쳐나간 곳도 그 자리였다.

가끔은 잡은 고기를 예전에 살던 살무니 작은아버지 댁에 가져갔는데 그때마다 작은아버지는 요새 가래질도 못해서 먹기 힘든 붕어조림을 조카덕분에 자주 맛본다 하시며 좋아하셨다. 그 다다음해인가 강화읍으로 이사 갈 때까지 나는 틈만 나면 장지포 방죽을 찾았다.

그 이후로도 서너 번 장지포 방죽으로 낚시하러 다녀왔지만 회사에 다니게 되어 대구 대전 등지에서 근무하면서부터는 멀기도 하고 더 좋은 낚시터를 찾아다니느라 장지포 방죽을 잊은 지가 삼십년 정도 넘었는데 그사이 아버지도 작은아버지도 두 분 다 돌아가셨다.

금년 봄 고향의 아버지 산소에 들렀다 오던 길에 건평리와 외포리의 그 뚝 길을 따라 새로 생기는 강화일주 해안도로를 지나면서 여기가 그 수문통 옆이구나 하며 지나친 적이 있다.

이 글을 쓰면서 언제 일부러라도 집사람과 함께 노고산의 그 언덕길을 한번 올라야지 그리고 거기서 집사람에게 이렇게 이야기해야지 생각하면서 준비하는 말이 있다.

“ 여보, 여기를 오십년 전에 아버지와 첨 와서 저쪽을 봤거든. 그런데 그 뒤에는 이순실이라는 거물 여자 간첩도 여기를 지났대.”

생뚱맞게 갑자기 왜 여간첩 이순실이냐고?

언젠가 강화도를 거쳐 월북했다는 여간첩이 하루 숨었던 곳이 바로 건평리 노고산이라는 뉴스가 있었는데 그 여간첩 이순실은 이북에서도 당 서열이 매우 높은 거물이라 했다. 그 일 있기 몇 년 전에 다른 고정간첩 사건으로 떠들썩한 적이 있었던 곳도 건평리 노고산 밑의 마을이었다. 그냥은 그저 조용한 시골이지만 고향의 그곳도 우리 분단의 삶 속에서 알게 모르게 그런 우여 곡절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장지포 방죽은 바로 그런 위치에서 그 이름과 자리를 지키며 언젠가 다시 찾아올 나를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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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웅
역시 어떤 분야이건 전문가의 수준은 다른데가 있는 법이다. 효철 釣士의 어릴 적 천엽(川獵)놀이 터이었던 장지포 방죽에 어린 추억과 꼬마 川獵꾼의 武勇談(?)을, 아니면 業積, 서술한 내용인데, 그 쪽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면 써 내려가기 불가능한 수준의 이야기이다. "가래" 만드는 법, 가래질, 더듬질 등을 묘사한 대목은 그 부분을 통달한 사람이 아니면 엄두를 낼 수 없는 묘사이고, 늦여름, 아마도 웃통을 거의 벗은 삼사백의 장정들이 가래질을 하는 모습은 어린 천렵꾼에게는 영원히 가슴에 남는 "장지포 방죽"의 축제이었을 듯 싶다. 어린 천렵꾼이 얼마나 그 놀이에 빠져서 즐겨했었는가가 글 속에 지금도 흠뿍 배어있다. "가래"를 대체한 "초코"- 나일론 삼중 그물이라 했는데, 아마도 상품의 브랜드가 아니었는지?- 및 농약이 어린 천렵꾼의 낭만을 송두리째 빼앗았을 그때부터 장지포 방죽은 이미 감출 속살이 다 드러난 채이었던 듯하고 어린 천렵꾼의 장지포로의 행보도 마무리되었던 듯하다. 그러나 가슴에 남은 추억이야 고운 그대로 언제까지나 간직할 수 있는 법, 머지 않은 날 어부인 모시고 노고산 언덕길을 걸으며 소중한 추억들을 주렴으로 엮어 오랜 세월 간직하리라 본다.
사족을 붙이자면, 글 속에 나오는 몇몇 어휘들, 가래, 가래질, 더듬질, 모쟁이 등은 지금도 잘 살려서 순수한 아름다운 우리말로 잘 보존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진다.
2009-01-21
22:5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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