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어머니와 외가
이름: 이효철


등록일: 2013-02-24 19:29
조회수: 1429 / 추천수: 190


   어머니와 외가

 외갓집은 고향인 살무니에서 시오리 정도 거리의 조산부락에 있었는데 어릴 적엔 외할머니가 나를 끔찍이 반기셔서 나는 틈만 있으면 외갓집을 찾았다.
 예전 동내에서 칠공주집이라고 불린 외갓집은 딸 일곱에 아들 하나인 부잣집으로 외할아버지가 외삼촌을 서울 배재학당에 유학을 보내 방학 때 사각모에 망토차림의 교복으로 시골을 휘젓고 다니는 인물 좋은 외삼촌의 모습을 보고 소학교 다니던 아버지는 매우 부러웠다고 했는데 나중에 처남 매부지간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던 농사꾼 아들 때 이야기다.
 어머니는 일곱 딸 중의 여섯째로 조산소학교를 졸업하고는 결혼할 때까지 그 학교에서 교사로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에게 배웠던 오촌 댁은 살무니의 집 옆 작은할아버지 댁에 살면서도 어머니를 무척 어려워했다.
 외갓집은 안채 사랑채 말고도 넓은 다락방이 있는 행랑채까지 있었고 안채 부엌 옆 담장 안에는 도르래 줄을 당기는 두레박에 시멘트바닥으로 정리된 큰 우물이 있어 살무니의 내가 살던 집과는 규모로도 또 사는 살림정도로도 비교가 안됐다.
 외할아버지는 인천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만주의 중앙은행에 근무 중이었던 여섯 번째 사윗감의 소문을 듣고 흔쾌히 우리 집과 사돈을 맺었다고 했다.
 부잣집 딸로 자란 어머니는 그 일정 말기에도 큰 고생하지 않고 자랐으며 소학교를 다니고는 교회에서 유년부 교사와 소학교 선생까지 했을 정도로 남보다 개방적인 처녀 시절을 보냈는데 그건 신앙심이 깊어 조산교회 세우는데 큰 역할을 했던 외할머니의 보살핌 때문이었다.
 칠공주 중에 소학교를 처음 다닌 딸은 어머니로 그 이전에는 아직 조산소학교가 문을 열기 전이여서였다. 바로 밑의 막내이모는 서울로 유학을 해서 여학교까지 다녔는데 어머니는 어느 해 방학 때 막내이모의 안내로 초지까지 걸어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가서 인천에서 서울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 종로의 어느 안과에서 쌍꺼풀 수술을 했다고 하는데 수술비용은 교사 월급을 모은 것으로 준비했다고 했다. 어머니가 쌍꺼풀 수술한 사실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도 몰랐었다며 어느 날 어머니가 그 사실을 집사람에게 털어놨다고 집사람이 말해서 나도 알게 됐다.
 “그런데 어머님 말씀예요, 그 수술한 것이 마음에 안 든다고 다시 서울을 찾아가서 재수술까지 했다고 하시드라고요. 정말 어머님이 그렇게 앞서가시는 분인 줄 몰랐어요. 그 시절엔 수술하러 서울 간 것만도 대단한데 거기다 재수술까지.........”
 “그래? 그거 참........ 평생 우리 오남매한테는 입도 안 떼신 이야긴데 어떻게 며느리인 당신에게는 다 털어 놓으시네........당신과 어머니는 통하는 게 있나보지?”
 그 이야기를 들으니 잘 몰랐던 어머니의 남부럽지 않았던 외갓집 시절 모습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내가 철이 들면서 봐온 어머니는 아버지의 박봉으로 다섯 남매를 공부시키느라 고생만 하는 어머니였지 그런 처녀시절을 보냈다고는 상상이 안됐다.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어머니가 어렸을 적 부잣집 딸로 크던 시절을 떠올릴만한 일이 그 얼마 전에 있었기 때문에 평소 관심도 없었던 어머니의 옛 이야기가 무척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집사람에게 수술이야기를 듣고 며칠 후 어머니 방에 들렀다가 어머니에게 그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 아버지가 엄마 눈 수술한 거 돌아가실 때까지 몰랐던 게 정말 사실예요? 나도 놀랐네........ 왜 엄마 그거 아버지한테 비밀로 했어요, 엄마........”
 중년이 훨씬 넘은 아들이 엄마 엄마하면서 물어봐도 어머니는 그저 빙긋이 웃고 아무 말도 안했는데 그것이 어머니의 대답이었다.
 60년 넘게 함께 살아온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후 어머니를 집에 모시고 살면서 보니 어머니는 말수가 예전보다 몰라보게 무척 줄었다.
 그날도 어머니는 내 질문에 대부분 웃기만 하시고 맞으면 고개를 끄덕이고 아니면 고개를 좌우로 약간 흔드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자식들에게 별로 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동안 어머니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는 크게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어릴 적 부자 외갓집의 기억은 있었어도 그걸로 어머니의 어린 시절과 연관시켜 상상해본 적은 얼마 전까지 거의 없었으니 말이다.

 아직도 내가 잊지 않고 있는 외갓집의 기억 중 하나는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바로 전쯤으로 큰 외사촌 형이 장가가던 때의 일들이다.
  육남 삼녀의 맏이인 큰 외사촌 형이 장가가던 날 그 넓은 외갓집은 무척 북적거렸는데 그 때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다 살아계셨을 적으로 당시 면장인 외삼촌의 남매지간인 칠공주의 식구들까지 모인 잔칫집은 끊임없는 하객들로 종일 사람들이 넘치고 넘쳤다. 안채 우물가와 부엌에는 아낙들이 음식 준비하느라고 종일 바빴고 행랑채의 넓은 다락방에도 음식이 쌓여서 다락방을 책임진 동네 아저씨가 접시에 전이며 고기며 과일을 계속해서 담아내는데 그 아저씨가 나에게 자주 먹을 것을 주곤 해서 나는 종일 다락방에서 살다시피 했다.
 나이 드신 어른들은 외할아버지가 계시는 사랑방으로 모셨고 외삼촌은 종일 분주히 집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오는 손님을 맞고 가는 손님을 배웅했다. 외삼촌댁은 돌아가는 분들에게 종이에 쌓은 꾸러미를 하나씩 둘씩 안겨 보냈는데 그 꾸러미 안에는 푸짐한 잔치 음식이 골고루 들어있었다.
 저녁에 남포불 밝힌 행랑채 마루에 발목이 묶여 매달린 외사촌 형은 동내 청년들에게 발바닥을 수없이 맞으면서도 싱글벙글거렸는데 그것이 새신랑을 다는 풍습이었고 그날 신랑을 매다는 밧줄을 붙잡고 있었던 젊은 청년은 얼마 전에 돌아가신 나의 초등학교 은사다.
 그 외갓집이 몰라보게 변한 것을 확인한 것은 아버지 돌아가신 그 해 어느 날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 산소를 들른 후 조산 그 동네에 남아 살고 있는 다섯째 사촌 집에 들러 나왔을 때 어머니가 옛집에 가보자고 해서였다.
 내가 대학교 다닐 때 외갓집에서 집 앞의 큰 나무를 배경으로 해서 사진 찍은 이후로 그날 외갓집을 처음 찾은 것 같은데 외사촌 집과는 불과 백여 미터도 안 떨어진 옛 외갓집 찾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사진 배경이던 그 큰 나무가 있던 곳은 아예 가늠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기억을 따라 가까스로 찾아낸 외갓집은 행랑채도 헐렸고 사랑채도 변했으며 겨우 안채만 알아 볼 수 있었는데 안채에 살고 있던 늙은 여인은 그 집이 어머니의 생가였다는 내 설명을 듣고 아 그러냐고 했는데 그 여인은 외가와는 전혀 연고가 없는 타 지역 사람이었다.
 외갓집의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 것은 외할머니 그리고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내가 인천으로 이사한 419 지나서 부터다. 외삼촌이 면장을 십여 년간 해오다가 첫 민선 면장 선거에 동내 교회, 그러니까 외할머니가 세운 그 교회의 이웃집 장로가 출마하는 바람에 이백여 표가 깎여서 두 표 차이로 면장 직을 놓은 후 인천으로 이사했는데 외삼촌은 인천에서 삼년 정도 살다 돌아가셨다.
 장손인 큰 외사촌 형은 아들 하나만 낳아 키우면서 고향집을 지키다가 지병으로 젊은 나이에 죽고 외삼촌댁은 장손인 나의 조카 벌 되는 손자의 사업을 위해 여기저기 땅을 처분했는데 그 조카가 제대로 성공하지를 못했다.
 구남매의 외사촌들은 다섯째 사촌이외에는 거의 인천이나 서울로 거처를 잡아 고향을 떠나서 외가를 찾아도 어렸을 때 분위기가 변한지는 이미 오래다.
 어머니가 부잣집 딸로 자랐다는 걸 확실하게 각인시킨 건 아버지 생전에 어머니를 모시고 외가에 다녀올 때의 일이다.
 아버지 돌아가시기 이 년 전쯤 어느 날인데 어머니만 모시고 단 둘이 조산리의 외사촌집을 들렀다가 나오는 길에 어머니가 저 동내 안쪽으로 같이 가보자 해서 차를 어머니가 가자고 하는 방향으로 몰았다. 그쪽은 옛 외갓집보다 안쪽 동내로 어렸을 때 지름길을 찾아 신작로에서 질러갈 때 여러 번 다닌 적이 있었던 곳으로 신작로에 버스가 다닌 후로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그날 거의 사십여 년 만에 그 쪽에 들렀는데 어머니가 찾은 그 집은 전혀 기억이 없는 집이었다. 그 집 바로 옆은 송씨네 집으로 그 송씨의 손녀가 서울 서초동의 같은 사무실에 근무한 적이 있어서 기억할 수 있었지만 어머니가 찾은 집은 전혀 기억에 없는 시골 농가집이다. 그 집에서 나와 어머니를 맞은 사람은 어머니보다 십년정도 나이가 들어 보이는 백발의 노파였다.
 “아이고 이게 누구시이꺄. 애기씨아니시이꺄. 아이고, 애기씨........ 어떻게, 어떻게.......”
 말을 잊지 못하고 어머니 손을 맞잡은 노파의 애기씨라는 말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어머니보다 분명히 손 위의 그 할머니는 어머니를 애기씨, 애기씨라고 반기는데 어머니는 거기다가 하대로 이야기했다.
 “그래 잘 있었나. 상구아범도 잘 있고.......”
 이건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 나오는 평사리의 이야기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그 노파와 칠십 여 년 훨씬 전의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애기씨 소리 들어가며 자란 어머니의 어린 시절이 있었다고는 염두에도 없었기에 그 순간 나는 무척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집 앞에서 십여 분 정도 어머니와 노파가 대화하는 동안 나는 팔십이 거의 다 되가는 어머니의 얼굴에서 노파의 등에 업혀 투정하며 재롱도 피웠을 어머니의 모습을 도무지 상상해내기 어려웠다.
 노파는 어머니에게 집에 들어가자고 했으나 어머니는 한사코 마다했는데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남의 집을 찾은 터라 나는 그편이 오히려 마음 편했다.
 작별을 아쉬워하는 그 노파를 뒤로하고 그 집을 떠나 큰 길에 나서서야 나는 어머니에게 물었고 어머니가 설명했다. 그 노파는 외갓집에 여종으로 일하던 하녀로 어머니가 어렸을 때 어머니를 업어 키웠는데 나중에 외할아버지가 집안의 머슴과 결혼시켜 살림을 차려줘서 그 동내에서 자식들을 낳아 키우고 지금까지 살고 있다고 말이다.
 궁금한 것이 있어 어머니에게 이것저것 물어봤으나 그 뒤로 어머니는 그저 웃기만 하고 거의 말이 없었다.
 도장리를 지나 온수리 초입의 어머니 외가인 아흔아홉 칸 기와집을 지나면서 나는 분위기를 바꾸고 싶어 한마디 했다.
 “엄마, 엄마........ 어머니 외갓집이네요. 강화군에서 수리해서 그런지 많이 깨끗해졌네요”     어머니가 아무 말씀이 없어 백밀러로 살피니 어머니는 이미 잠에 빠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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